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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발현되는 근세 철학 계몽주의

by 1teamleader 2024. 4. 24.

"이성과 자유와 진보를 위해" 계몽주의 사상

계몽주의란 좀 더 이성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 혁신적 사상입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 생활의 진보와 개선을 꾀하려고 했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시대의 제도와 사상에 반대했기 때문에 기존의 특권 계층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구시대를 지배하던 것들에 맞선 자연, 인간과 인권, 이성과 과학,  휴머니즘과 자유 같은 용어가 등장합니다. 프랑스의 절대 군주인 루이 14세가 죽자 계몽주의는 고삐 풀린 강아지처럼 매우 급진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개선하려고  하기보다는 아예 없애 버리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정치를 점진적으로 바로잡으려 하기보다는 혁명을 통해 새롭게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모든 일은 '이성과 자유와 진보를 위해!라는 표어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이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투쟁하다

계몽주의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당시의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집필자들이 여러 학문을 집대성해 '백과전서'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의 출간에 참여한 184명의 계봉주의자 집단을 '백과전서파'라고 부릅니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루소 등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속해 있였습니다. 백과전서는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인 로베스피에르는 "백과전서파의 영향을 무시하는 사람은 우리 혁명의 서곡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백과전서파에 속한 계봉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고 종교를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당국의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백과전서 파가 모든 종교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보다 자유롭고 행복한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투쟁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달랑베르는 "모든 독단적 교리에서 벗어나 예수가 가르친 대로 인간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공경해 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보다 더 격렬하게 종교를 비판한 사람들이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라메트리는 "하나님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영혼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정신 작용이나 사유 역시 신체적 활동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영혼을 육체적 성장의 산물이라고 보고 발이 걷는 근육을 갖고 있는 것처럼 뇌는 생각하는 근육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답니다. 유물론자들은 "형이상학이란 꾸며 낸 환상에 지 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종교 역시 거짓을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류를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고 좀 더 행복한 시대에 살게 하기 위해 올바른 의미의 계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 사상의 등장

투소는 젊은 시절에 그리 모범적이지 안 않습니다. 하는 일 없이 놀고먹고 도둑질과 사기를 일삼았습니다. 근거 없는 말로 얌전한 여자를 헐뜯고 분별없이 삼류 소설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직업을 수없이 바꾸며 방황하던 루소가 유명한 문필가의 대열에 끼게 된 것 프랑스에 위치한 디종시의 학술원에서 '학문과 예술의 진보가 풍속의 파괴나 고양에 이바지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논문을 현상 공모했을 때였답니다. 여기에 루소의 학문과 예술론 이 당선된 것입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같은 학술원에서 또다시 논문을 현상 공모했을 때 루소가 제출한 글이 그 유명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입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모든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밝혔습니다. 재산이 생겨 부자와 빈자로 갈라진 것, 주종 관계가 생겨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구분된 것, 주인과 노예를 제도적으로 대립시켜 놓은 것이 화근이 되어 불평등이 생겨났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소의 견해에 따르면 불평등이 생겨나면서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명령을 내리고, 미련한 자가 현명한 자를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중은 최소한의 생활 여건도 갖추지 못했는데 극소수의 부자는 지나친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자연 상태와는 너무나 다른 상태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평등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 사회계약론

서로 간에 평등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 루소는 새로운 사회를 적극적으로 구상했습니다. 그는 '사회 계약론'에서 권력이 정당하려면 전체의 합의, 즉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동 의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합의가 바로 '사회 계약'입니다. 각 구성원은 자신의 인격과 자기가 가진 모든 권능을 일반 의지에 종속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공적 주체로서 의 국민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국민만이 유일한 주권자가 됩니다. 일반 의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투표를 통해 찾아낼 수 있습니다. 투표를 거치면 다수의 의견이 채택되고 소수의 의견은 채택되지 못하지요. 자기의 뜻에 어긋난 법문이 채택되더라도 구성원 개개인은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성원의 변하지 않는 의지가 곧 일반 의지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야만 모든 구성원이 국민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회에서 국회의원 각각이 어떤 법률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법률이 일반 의지와 일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각각의 의원은 투표권을 행사하고 그 표수로 일반 의사를 확인합니다. 내 의사와 반대되는 견해가 표를 많이 받았다면 내가 그동안 착각했단 뜻입니다. 즉 내가 일반 의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일반 의지가 아니 다는 것입니다. 루소는 역사적, 문화적 성과를 비판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 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의 빛'으로 이룬 진보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인 볼테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루소의 숙적이라고 불릴 만큼 루소와 견해를 달리했습니다.

'학문과 예술론'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볼테르는 루소를 조롱했어요. 인간을 짐승으로 묘사한 저작을 읽고 나니 발로 걷고 싶을 정도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기질이나 사상이 정반대였던 두 사람이 지금은 프랑스 파리의 팬테온에 나란히 있답니다.  

철학자 루소의 교육론

루소는 자신의 교육론을 '에밀'에 담았습니다. 에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외부의 어떠한 강제도 없이 자유롭게, 오직 자기의 소질에 따라, 항상 자기의 감정에 충실하게. 그리고 완전히 자연스럽게 성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반자연적인 것, 이를테면 관습과 규칙 등은 거부해도 좋다. 그리스도교의 원죄설마저 거부할 수 있다. 교육은 소극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쳐야 한다."

다섯 명의 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보낸 그가 교육론을 펼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에밀을 읽은 후 농사를 짓고 우유 짜는 부인의 흉내를 냈다는 일화에서 루소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교육학자인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아동 교육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페스탈로치는  프랑스혁명의 남은 영향이 스위스로 밀려왔을 때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는 지능, 신체, 도덕을 조화롭게 발달시키는 교육을 실천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사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페스탈로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한  듯 그의 묘비에는 "모든 것은 남을 위해 했으며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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