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최대다수의 최대향복, 영국의 공리주의

by 1teamleader 2024. 5. 2.

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바라다. 영국의 공리주의  

공리주의란 19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윤리 학설입니다. 공리주의자들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효용과 행복에 두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실현을 윤리적 행위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공리주의는 "쾌락을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 밀의 질적 공리주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밀은 인간이 동물적인 본성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질적으로  높고 고상한 쾌락을 추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쾌락과 고통의 양이 중요하다. 벤담

영국의 철학자 벤담은 인생의 목적을 쾌락이라고 보고 그것을 행복과 같은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다만 행복이 개인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여러 사람의 것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리주의는 공중적 쾌락주의로 연결됩니다. 벤담은 "자연은 인류를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두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기준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벤담은 쾌락과 고통의 양을 중요시하면서 양을 측정하는 일곱 가지 기준으로 강도, 영속성, 확실성, 원근성, 다산성, 순수성, 범주를 꼽았습니다.  

벤담은 영국 런던의 중산층 가정에 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마음이 약한 아이였습니다. 몸이 허약한 데다 감수성 또한 예민했습니다. 식모에게 귀신 이야기를 들으면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금 자란 뒤에는 사냥이나 낚시를 하는 곳에 끌려다니기도 했지만 역시 재미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타고 난 성격이 동물을 함부로 죽일 수 있을 만큼 잔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변호사가 된 벤담은 여러 가지 법 개혁안을 내놓았습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흠모하다. 밀

영국의 천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밀은 천재였다고 합니다 그는 3세 때 그리스어를 배우고 '이슈 이야기'를 읽기 시 작했다고 합니다. 8세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해 4년 뒤에 는 아주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빌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만하지 않도록 교육시켰고, 그래서 밀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밀은 아침에 아버지를 따라 소풍 하며 전날 읽었던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휴일도 없이 독서에 열중했기 때문에 친구 들과 놀 수도 없었습니다. 주로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방적이고 단조로운 교육 탓에 밀은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20세가 되자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라며 무력감에 빠진 것입니다. 정서적 능력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밀은 그림과 음악을 감상하는가 하 면 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워즈워스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은 벤담의 사상을 이어받아 공리를 모든 가치의 원리로 보는 공리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밀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쾌락을 구하고 고통을 피하기 때문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는 바르고 그와 반대되는 행위는 그른 것이 됩니다. 다만 행복은 한낱 개인만 누 려서는 안되고 되도록 많은 사람이 누려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밀은 쾌 락의 양을 중시한 벤담과 달리 그 질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러한 밀의 생각은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배부른 돼지보 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라는 유명한 말에 담겨 있습니다.

밀과 테일러 부인의 러브 스토리

밀은 24세 때 런던의 사업가인 존 테일러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그곳에서 테일러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밀보다 한 살  아래였던 그녀는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고 있었습니다. 테일러 부인은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밀을 단념하려고 했고, 존 테일러 역시 아내에게 단념하라고  설득했지요. 밀 또한 부인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존 테일러가  세상을 떠나자 밀은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테일러 부인과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1858년  겨울에 밀은 아내와 함께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내가 감기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밀은 아내의 유해를 묻고 묘지 가까운 곳에 정착해 책을 썼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 가운데 하나인 '자유론'을 써서 아내에게 헌정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의 큰딸인 헬렌 테일러가 밀을 돌보았습니다. 아비뇽에서 곤충기의 저자인 파브르와 소풍을 나갔다가 병을 얻은 밀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간호하던 헬렌을 향해 "나는 내 일을 다 끝마쳤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밀의 유해는 아비농에 있는 아내의 묘 옆에 나란히 묻쳤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