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위협하는 자연 과학의 발달,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새로운 우주관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것으로 평가되는 세 가지 위대한 발명이 있습니다. 바로 나침반과 화약, 인쇄술입니다. 첫째, 나침반을 통한 먼 거리 항해가 가능해지면서 발견 시대가 열렸습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고, 바스 쿠 다가마는 인도 항로를 개척했으며, 마젤란은 처음으로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한 바퀴 도는 데 성공했습니다. 둘째, 화약이 발명되자 기사 계급이 몰락하면서 신분제도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셋째, 인쇄술의 발달로 새로운 사상이 빠른 속도로 멀리까지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자연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입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많은 별들 가운테 하나에 불과하다."
라는 주장은 당시에는 혁명에 가까운 새로운 우주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동설에 입각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천문학자인 케플러는 우주에 통일적 법칙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화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행성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하는 등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이 내세운 새로운 이론은 철학 자들에게도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는 대학교에 다닐 때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갈릴레이는 네덜란드 사람이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관측할 때 사용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우주는 수학 문자로 쓰인 책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갈릴레이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성경이 지동설에 모순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로마의 종교 제판소는 이 일을 문제 삼아 갈릴레이에 대한 결석 재판을 열었습니다. 제1차 재판에서 갈릴레이는 "앞으로 지동설에 대해 절대 말하지 마라."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종교 재판소로 불려 가 제2차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위법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서 약했습니다. 그 후 금고형이 선고되었지만 교황의 배려로 감형되어 죽을 때까지 피렌체의 집에 연금되었습니다. 이는 외부와의 접촉을 감시하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지만 일정한 장소 내에서는 신체의 자유를 허락하는 비교적 가벼운 감금에 해당합니다. 갈릴레이는 시력을 잃어 가는 상태에서도 사랑하는 큰딸과 함께 책을 쓰는 데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유가 허용된 네덜란드에서 책을 내고 속편을 쓰던 중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갈릴레이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 주려던 사람도 있었지만 종교 재판소에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소를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과장된 것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피사의 사탑에서 자유 낙하 실험을 했다는 말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갈릴레이는 무게가 다른 공 두 개를 떨어뜨려 본 후 "물체의 낙하 시간은 질량에 비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이 실험은 1586년에 네덜란드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스테빈이 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종교 개혁의 시작 루터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회를 이끌면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직자들은 타락하고 예배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어요. 교회는 독단적으로 운영되었고 교황청이 전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같은 현상을 바라보며 교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데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수 있었을까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이 일을 해낸 인물이 바로 독일의 종교 개혁자인 루터입니다. 그는 교회의 독선에 반대하고 사제들만이 아니라 신도들 누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종교 분야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인간 해방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부패한 생활과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건축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교황청이 면죄부를 판 사건입니다. 성직자들은 "누구든지 뉘우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돈이 이 상자 속에 쌀랑하고 들어가면 지옥의 불길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 조의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반박문을 통해 루터는
"말씀으로 돌아가라!"'
라고 외쳤습니다. 인간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만 구제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의 반발은 엄청났습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신도로 서의 자격을 빼앗고 내쫓김을 당했으며, 결국 제국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선언하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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