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르의 기구한 러브스토리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벨라르는 실재론과 유명론의 중간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아벨라르는 "개별자 속에 보편이 들어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을 포함하는 각각의 인간에게 보편 개념인 "사람다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한 안셀무스와 반대로 아벨라르는 '믿기 위해 알고자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벨라르는 무척 똑똑해서 스승과의 논쟁에서 늘 자신이 이기자 스승들을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성격이 이기적인 데다 남의 잘못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는 자연스레 이웃과도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논리가 치밀하고 학문이 깊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보기도 했습니다.
학자로서 유명해질 무렵, 아벨라르는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 회원인 필베르의 조카딸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엘로이즈는 미모가 빼어 난데다 학문적 재능도 뛰어난 15세 숙녀였습니다. 얼마가지 않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벨라르는 20년이라는 나이 차이틀 생각하며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매질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아이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고향인 부르타뉴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엘로이즈는 '결혼은 철학에 대한 배반'이라며 결혼을 거부했습니다. 아벨라르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 뒤에도 아벨라르의 명성에 흠집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 대외적으로는 결혼한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얼마 후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권고에 따라 아이를 아벨라르의 누나에게 맡기고 수녀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필베르는 아벨라르가 자신의 조카딸을 버리고 가문을 모욕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아벨라르의 하인을 돈으로 매수해 음모를 꾸몇습니다. 그는 아벨라르가 잠자는 동안 아벨라르를 헤치려 하였습니다. 이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아벨라르는 결국 수도원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신체의 한 부분이 절단되거나 상해를 입은 사람은 불결하다고 여겨 성당에 드나들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텔라르가 느꼈을 수치심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 상황입니다. 아벨라르가 죽은 뒤 엘로이즈는 편지를 보내 시신을 수도원으로 보내 달리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렸다고 합니다.
"나는 가후한 운명을 당신과 함께 모두 견뎌냈나이다. 청하오니 이제 당신과 함께 잠들게 하소서, 시련이 끝나게 하시 고,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소서."
아벨라르, 죽어서는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죽음에 이른 엘로이즈는 자신의 시신을 애인 곁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람들이 엘로이즈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벨라르의 무덤을 파헤치자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녀를 맞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엘로이즈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사람의 무덤은 여러 차례 옮겨지다가 1817년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페르라셰즈 묘지로 이장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영원한 안식처를 구한 이곳에는 땅에 끌리는 수도복을 입은 실물 크기의 남녀 석상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이 주인공들이 바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입니다. 수많은 연인들의 순례지가 된 이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답니다.
"우리는 바라노니 연구, 재능, 애정, 불행한 결혼 맺어진 두 사람이
이제는 한결같은 축복 속에서 영원히 맺어지기를"
아퀴나스 병어리 황소, 귀인으로 받들어지다
스콜라 철학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가운테 중기는 전성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이 시기의 대표적 철학자입니다. 아퀴나스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그가 탁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형들이 강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형들은 아퀴나스를 단념시키기 위해 그 를 성에 가둔 후 예쁘게 치장한 젊은 여자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불이 붙은 장작을 휘두르며 그 여자를 내쫓았습니다. 결국 이 같은 아퀴나스의 신앙심에 감 동한 누이들이 광주리를 이용해 성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책상에 둥근 홈을 파야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이 켰다고 합니다. 친구 들은 그를 ' 병어리 황소'라고 불렸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아퀴나스에게 보충 수업을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어는 유명한 교수보다도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그의 능력을 일찍이 알아차린 스승이 있었어요. 바로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일베르투스 마그누스였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놀리는 이 벙어리 항소가 언젠가 한번 울부짖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진동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질 것이다."
스승의 말은 틀리지 않았답니다. 파리 대학교에 신학 교수로 취임한 아퀴나스 는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박식하다 고 소문난 그의 토론 수업에는 학생들뿐 만 아니라 동료교수들까지도 모여들 정도였습니다.
합리적인 신의 존재의 증명, 신학대전
"신학 대전"은 아퀴나스의 대표적 저서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합리 적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신앙과 지식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아퀴나스가 신학 대전을 쓰려고 조용한 수도원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퀴나스는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신비스러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내가 기록한 것들은 오늘 내가 본 것에 비하면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후 펜을 던지고 쓰러졌습니다. 아퀴나스는 제2차 리웅 공의회에 참석해 달라는 교황의 요청을 받고 걸어서 여행하다가 피로가 쌓여 병을 얻었습니다. 결국 그는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머물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속했던 도미니크 수도회에는 아무리 먼 곳일지라도 모든 여행은 반드시 걸어서 다녀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생전에 '천사와 같은 학자'로 칭송되었습니다. 그의 온화하고 티 없는 성품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뒤에는 성인으로 받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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