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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의 최후의 순간, '악법도 법이다'

by 1teamleader 2024. 4. 17.

지난 시간에 이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시간에는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순간에 대해서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정치적 음모에 말려들어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의 신 대신 새로 운 신을 믿는다는 죄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면 그 무렵의 정치적 상황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가 점점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동맹에 참가한 여러 도시 국가는 아테네가 각국의 자치권을 위협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때 아테네의 맞수 스파르타가 호심탐탐 아테네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코린트와 메가라 등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동 맹 회의를 열어 아테네와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한 뒤에 스파르타를 부추겼습니다. 그 결과 스파르타가 전쟁을 일으켰고, 아 테네는 기원전 404년에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30년 동안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자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식의 몇몇의 우두머리가 국가를 운영하는 독재적인 정치 체제(이른바 '과두정치'라고 합니다.)가 들어셨습니다. 그러나 또 한 차례 정권이 뒤집혀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자로 보고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론이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제자와 친구들 대부분이 귀족주의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평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해충'라고 불린 정도로 부정했던 야심가들에게 쓴소리를 해 왔습니다. 옳지 않은 정치적 살인에 동참하리는 고위직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으니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혔던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소신을 지키며 본인을 굽히지 않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은 배심원 500명이 참여한 가운데 하루 동안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배심윈들은 30세 이상의 아테네 시민으로서 국가에 빚이 없으면 누구나 배심원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신에 대해 무례한 태도를 보인 사람에 대한 1심에서는 유죄냐 무죄냐에 대해서만 판결을 내렸어요. 형량은 2심에서 결정되는 구조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1심에서 280 대 220의 적은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2심이 진행되기 전에 사과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시민들과 배심원들을 꾸짖다시피 말했습니다.

 

"너희는 지갑을 채우는 데만 애태울 뿐 도덕적 판단이나 진리를 구 하고 영혼을 개선하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충고한 것입니다. 2심의 결과는 360 대 140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참담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충고는 그를 무죄로 판결한 배심원들의 비위까지 뒤집었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까지 꺽기지 않은 인품

당시에는 아테네 법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24시간 안에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때는 처형이 금지된 기간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해마다 델로스 섬에 배를 보내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쳤는데, 배를 꾸려 출발하는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를 신성한 기간으로 여겨 이 기간에는 처형을 금지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때는 마침 떠날 배의 뒷부분을 장식하던 날이었다고 해요. 더욱이 배가 역풍을 만나 보통 때 보다 돌아오는 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소크라테스의 처형은 그만큼 늦추어지게 되었답니다. 소크라테스는 한 달 정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몇몇 제자는 탈옥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잘못한 일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너무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일은 정의에 어긋난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 탈옥한다고 해서 선생님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아테네 법을 따르며 잘 살아왔는데 나에게 불리해졌다고 해서 법을 어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속에는 '처음부터 법을 지켰으면 끝까지 지켜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지키고 불리할 때는 지키지 않는 것은 너무 비겹한 행동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주장한 대목입니다.

 

의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소크라테스

델로스 섬에서 배가 돌아온 날, 해 질 무렵이 되자 간수들이 독이 든 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형 시간은 해가 지는 시각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해가 저문 후에도 술이나 음식을 원하는 대로 먹고 마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여자를 불러 욕정을 채운 후 독을 마신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빨리 가져오라고 한 다음 태연하게 기도를 올리고 나서 의연한 자세로 조용히 독약을 마셨습니다. 그 후 잠시 감옥 안을 거닐다가 다리가 무겁다며 반듯이 드러누웠어요. 하반신이 거의 식어 갈 무렵에 그는 얼굴에 덮여 있던 천을 젖히고 친구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꼭 갚 아주게!"

 

당시에는 병이 나으면 감사의 뜻으로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스클 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인데, 그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책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서양 칠 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지 요. 죽음 앞에서 보여 준 고매한 태도와 그 누구 도 흉내 낼 수 없는 훌륭한 인품 덕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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