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집중하는 관념론과 나 밖의 자연에 집중하는 유물론
나와 밖에 있는 사물 가운데 어느 쪽이 중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물론 나와 사물, 자아와 자연, 정신과 물질, 의식과 대상, 주관과 객관 모두 중요합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둘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둘 사이의 대립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는 칸트 이후 서양 천학자들에게 맡겨진 과제였습니다. 이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나, 자아, 정신, 의식, 주관 쪽을 강조하는 사조를 관념론이라고 부르고 후자에 속하는 사물, 자연, 물질, 대상, 객관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는 사조를 유물론으로 구분합니다. 피히테와 셸링, 헤겔 등 독일 관념론자들은 이 둘을 종합하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칸트라고 오해받은 익명의 저자, 피히테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 철학자인 피히테는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주일 설교를 듣지 못한 한 영주 앞에서 기가 막히게 목사의 설교를 흉내 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피히테의 역량은 알아본 그 영주의 도움으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에 다닐 무렵 후견인이었던 영주가 죽자 피히테는 다시 어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던 그는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나머지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평소 존경하던 칸트를 찾아갔지만 상대방은 말대꾸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칸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민 끝에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를 익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 무렵 칸트의 종교 철학책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들은 칸트가 그 책을 썼다고 오해했습니다. 칸트가 이 사실을 알고 모든 정황을 밝힌 후 피히테는 단번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나 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되기까지 했습니다. 피히테는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베를린에서 '독 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은 1807년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매주 일요일 오후에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을 재건하려면 국민정신을 떨쳐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베를린을 빼앗긴 독일 국민들은 이 연설을 듣고 큰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피히테는 유럽 전체를 정복하려 한 나폴레옹을 '모든 악의 화신'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해방 전쟁이 시작되자 제자들을 군대에 입대시켰고 자신도 정훈 장교로 전쟁터에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간호사인 아내가 걸린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죽었습니다.
주관적인 자아가 밖의 대상까지 정립한다고 주장한, 피히테
앞서 살펴본 대로 칸트는 사물 자체의 존재와 인간의 선천적인 자발성을 동시에 보장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사물 그 자체를 인정하는 독단론과 오직 주관적 표상만을 인정하는 관념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피히테는 관념론의 편에 섭니다. 그는 칸트를 계승해 자아를 유일하고 절대적인 원리로 삼았습니다. 피히데는 주관적인 자아가 밖의 대상까지 정립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칸트가 말한 오성이 플라톤 철학에서의 우주의 창조신 같은 것이라면 피히테가 말한 자아는 그리스도교의 성령처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자아가 비아야, 나 밖의 모든 세계와 자연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피히테는 자아로부터 철학의 모든 체계를 통일적으로 이끌어 내는 '지식학'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자연과 정신은 동일하다, 철학자 셸링
독일의 철학자 셀링은 피히테의 '지식하의 기초'가 발표되자 책에 담긴 근본사상을 저자인 피히테보다도 더욱 날카롭게 분석해 발표했습니다. 셀링의 나이가 불과 20세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피히테는 셸링을 높게 평가했고 두 사람은 친분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피히테가 셀링의 저작에 대해 비판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논쟁하게 됩니다. 셸링은 괴테의 추천으로 23세 때 예나 대학교의 부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럿이 모이면 섣부르게 행동하고 어색해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을 느껴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 제자는 셸링을 '12개의 팔과 12개의 발을 가진 아시아의 괴물'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초국가적인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은 셸링은 신성 로마 제국을 옹호하고 프랑스혁명은 반대했습니다. 1841년에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나이가 많은 셸링을 베를린으로 초빙했습니다. 왕은 당시 지식인 사회를 풍미하던 헤겔학파에 견줄 만한 세력을 키우려고 그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셸링은 잠시 강의를 하다가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셸링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이란 자아가 생산한 것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자아 이전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는 점에서 주관과는 구별됩니다. 첫째, 자연은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심지어 죽어 있는 무기물도 살아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을 항상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생명으로서의 자연은 정신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정신이 깃들어 있고 동물이나 식물, 물, 흙, 돌 등의 무기물 역시 영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셸링은 자연과 정신이 동일하다는 동일 철학을 주장합니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정신이요, 정신은 눈에 보이 지않는 자연이므로 본질적으로 이 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서로 간에 구별이 있는데도 언제나 하나인 것을 셸링은 절대자 또는 신적인 것이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절대자가 우리 눈앞에 나타날 때는 주관과 객관으로, 정신과 자연으로 나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 그 자체가 신적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러한 셸링의 주장은 범신론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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