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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관념론을 완성, 헤겔 사상

by 1teamleader 2024. 4. 28.

헤겔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군림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에게로 흘러들어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에게로 흘러 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헤겔 철학이 지니는 의의를 표현한 말입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천박하고 우둔하고 역겹고 매스껍고 무식한 사기뿐인 헤겔"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헤겔은 하숙집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어 사생아를 낳았고 이 일 때문에 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명문 집안의 딸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때 해결은 "직장과 아내를 얻었으므로 이 세상에서 할 일은 다한 셈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헤겔은 베를린 대학교로 옮겨 13년 동안 재직하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불리며 독일 철학계에서 군림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여러 대학교의 교수직에 임용되었습니다. 헤겔 생전에 이미 해결 학파가 생겨났고 1930년에는 '국제 헤 연맹'이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헤겔 학기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를 출판한 일을 계기로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집니다. 그가 예수의 생애에서 복음서는 일종의 신화라고 비평하자 이를 계기로 찬반 토론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좌파에는 실증주의자와 유물론자들이 속했고, 우파에는 역사학파와 낭만파가 속했습니다. 좌파가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우파는 기존의 정치와 종교 질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잉겔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 자들은 좌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헤겔은 1831년에 콜레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학생들 가운데 나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헤겔은 그의 희망대로 베를린에 있는 피히테리 묘 옆에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모든 개인은 세계정신의 꼭두각시다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세단계를 거치며 발전합니다. 무조건 '정'으로서의 정립 단계와 부정으로서의 '반'정립 단계를 거처 종합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종합에 도달하는 즉 시 그것은 새로운 정립이 되고, 이 정립은 반정립의 비판을 거쳐 다시 종합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발전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이 변종법의 원리입니다. 헤겔은 변종법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 단계로 나눕니다. 첫째 단계는 즉자를 고찰하는 논리학입니다. 둘째 단계는 정신이 외화 된 상태를 고찰하는 자연 철학입니다. 셋째 단계는 정신이 보다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상태를 고찰하는 정신 철학입니다. 정신 철학은 다시 주관적인 정신을 다룬 인간학, 현상학, 심리학과 객관적인 정신을 다룬 법률, 도덕, 윤리, 그 리고 절대적인 정신을 다룬 예술, 종교, 철학으로 나뉩니다. 헤겔은 예술과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철학이라고 주장합니다.

 

헤겔은 2층 숙소에서 예나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보며 "말을 탄 세계정신을 보았노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헤겔이 역사 칠학에서 사용한 세계정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세계사 속에 자기를 전개하고 실현하는 신적 이성으로서의 정신을 세계정신이라고 보았습니다. 세계정신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 개인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각 개인은 개인적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계정신에게 이용당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대 이성의 교활한 장난으로 말미암아 개인은 모든 정열을 바쳐 들러리를 서 줍니다. 역사적으로는 열정, 용기, 선견지명 등을 갖춘 영웅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정신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 보잘것없고 연약한 인간들도 얼마든지 역사 무대에 등장시켜 이용하곤 합니다. 모든 개인이나 민족이 맡은 일을 해내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세계정신은 새로운 전진을 시작합니다. 모든 개인이나 민족은 세계정 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어떤 시점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은 바로 그 순간을 지배하는 세계정신에 합치하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토막상식, 나폴레옹 생애와 전쟁에서 활약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습니다. 10세 때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유년 학교에 입학해 5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파리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해 임관한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때 고향으로 돌아와 코르시카 국민 군 부사령관에 취임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로 옮겨와 왕당파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하고,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 등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습니다. 군대를 동원해 500인회를 해산시킨 나폴레옹은 원로원으로부터 제1 통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0년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벌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 머쥐었고, 1804년에는 국민 투표를 통해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해 황제가 되었습니다. 1805년에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 패배하지만 같은 해 12월에는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 군을 격파해 위엄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1812년에 프랑스군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1814년에는 영국과 러시아, 프로이선,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가 되어 100일 천하를 누리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곳에서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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