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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철학의 물줄기, 합리론과 경험론

by 1teamleader 2024. 4. 22.

근세 철학은 두 가지 큰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합리론과 경험론입니다. 합리론에서는 이성을 선천적인 인식 능력이라고 믿고 연역법을 사용합니다. 연역법이란 일반적 원리를 전제로 놓고 개별적 명제를 이끌어 내는 추리 방법입니다. 경험론에서는 모든 인식이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만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귀납법을 사용 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귀납법이란 개별적 사례들을 종합해 일반적 원리를 이끌어 내는 추리 방법입니다. 합리론자들은 신과 영혼의 존재,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 등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치를 받아들이며 다소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습니다. 반면 경험론자들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이다."라는 전제 아래 전혀 새로운 철학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과학 발달에 어느 정도 공헌했다고볼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유년시절과 연구에 대한 열정

합리론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등장했습니다. 합리론은 어떤 흐름 속에서 생겨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철학의 중심 원리로 여겨지고 수학이 보편타당성을 지닌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것 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테카르트와 네털란드의 스피노자,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합리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언듯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자만, 어린 시절에 그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자는 것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늦게 일어나는 것이 데카르트의 버릇이 되었는데 이 버릇은 그가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데카르트의 전기를 쓴 작가는 "철학과 수학 분야에서 데카르트가 남긴 중요한 업적은 그의 아침 잠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그에게 왜 늦잠을 허락했을까요? 데카르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몹시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낳은지 13개월 만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의사들은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모가 정성을 다해 건강을 돌본 덕분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데카르트는 평생 침대에 누워 사색하는 습관을 가 지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최대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줄이고 하루에 열 시간씩 충분히 자면서 사색하고 글 쓰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20년 동안 열세 번이나 집을 옮겼고 아주 친한 친구들 외에는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편지로 토론을 할 때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가명으로 수신인을 적었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광학 실험을 위해 자신의 안경일을 직접 갈기도 하고 생리학 실험을 위해 도살장에서 송아지를 사 와서 해부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서재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자 반쯤 해부된 송아지를 가리키며 "저것이 내 책 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수학을 연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철학을 연구할 때도 엄밀한 연역적 방법을 거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근본 개념에서 이끌어 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논의가 확고한 기초 위에서 시작되는가를 따져 보기 위 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모든것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데카르트는 이와 관련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신과 세계에 대한 주장을 이끌어 냈습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를 서로 독립된 두 가지 실체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마치 폭풍 속에서도 태양 광선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원론으로는 인간의 심신에 관한 문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손을 움직이려고 마음먹고 손을 움직 였다면 정신 작용이 신체 운동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또 날아가는 새를 눈으로 본 후새'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면 감각 작용이 사유 작용을 일으킨 것이 됩니다. 데카르트는 스웨덴 여왕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에 갔습니다. 여왕에게 아카데미 설립에 관한 계획서를 바치고 돌아온 뒤 그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점점 열이 오르더니 폐렴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도 데카르트는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여왕이 보낸 의사들이 피를 뽑겠다고 하자 그는 "여러분! 프랑스인의 피를 아끼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주일 후 정신을 회복한 데카르트는 피를 뽑아도 좋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가래를 뱉는 일조차 고통스러웠고 숨쉬기마저 힘든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않아누운지 9일째에 평생 자신을 돌보아 온 유모에게 재산을 떼어 주라는 말을 남기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나의 포로가 된 지 오래구나.

이제 감옥에서 나와 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순간이 왔다.

용기를 내어 영혼과 몸의 분리를 기쁘게 견디리라."

 

데카르트는 생전에 스웨텐 국적을 취득하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스톡홀름에 묻혔다가 이후 프랑스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 교회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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